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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건드리면 안 되는 영역과 사용 설명서 본문

요즘 생각

인간의 건드리면 안 되는 영역과 사용 설명서

라우비 2017. 11. 5. 15:09

누구든 건드리면 안 되는 영역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 때 나의 반응은, 그걸 건드리면 안 되는지 내가 어떻게 아는가 하는 반발심이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사람은 물건이 아니라서 그 사람과 잘 지낼 수 있는 설명서 따위가 제공될 리 만무하다. 제조사조차 만드는 역할 그 자체에 크게 관여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없는 거더라.


인간은 설탕파의 큰 갈래 중 하나일 뿐이다. 지구상에 널려 있는 설탕을 이용해 생을 이어 나가는, 지구식 생명체의 한 갈래. 인간은 생존능력이나 육체능력으로 보면 다른 종보다 딱히 나을 것이 없지만, ‘범(general)’과 ‘용(use)’을 개발해낼 수 있는 감각기관과 인지능력을 갖추고 있다. 처음에는 단순히 생존을 위해 발전시켰을 시력이 주변 환경을 분석할 수 있도록 했다. 분석은 분리를 한다는 말이다. 그 이후로 인간의 인지능력 발달은 분리의 과정이었다. 땅에 굴러다니는 걸 그냥 통칭해서 ‘돌멩이’로 부르는 데서부터, 단단한 것과 무른 것, 색이 다른 것, 흔한 것과 귀한 것 등으로 수도 없이 분류하였다. 그 과정이 인지능력의 역사다. 거기서부터 용도가 나왔다. 어떤 것은 단단하고 뾰족해서 무기에 적합했고 어떤 것은 가루로 만들어 붙여서 그릇을 만들었다. 분류에서부터 용도를 가져왔다면, 물이나 나무 같은 것들은 그 물질의 특성에서부터 범용성을 획득했다. 물을 길어오는 이유는 마시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씻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뭔가를 반죽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물을 획득하는 시점에서 그 물이 어디에 쓰이는지는 알 수 없다. 한동안 ‘범용’인 물건은 만들어지기보다는 획득되었다. 그러다가 종이와 필기구가 나왔다. 종이는 넓은 용도를 위해 만들어졌다. 창호지로도 쓸 수 있고, 뭔가를 싸는 용도로도 쓸 수 있고, 뭐 등등. 나름대로 여러 용도로 쓸 수 있지만, 단연 필기구와의 조합이 인간 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규칙을 배우면 무엇이든 쓸 수 있는 물건. 만들어지거나 획득될 때 그 가능성이 정해져있지 않은 물건. 거기서부터는 이러쿵 저러쿵 해서 아무튼 컴퓨터가 나왔다.


가위나 칼과는 다르게 컴퓨터는 눈으로 좀 살펴보는 것만으로는 어떻게 써야 하는지 파악할 수 없다. 조심스럽게 그 생김새를 조물조물 하루 종일 만져도 알 수가 없다. 그러니까 컴퓨터를 모르는 사람에게 컴퓨터는 비싸고 무서운 기계다. 아무리 본다 해도 알 수가 없으니까. 그래서 인간은 그렇게 복잡한 물건들을 위해 그들의 조상을 활용했다. 종이에 쓰인 사용 설명서다. 조금이나마 허들을 낮추는 것이다. 종이에 쓰여있는 기호를 읽는 일은 컴퓨터보다는 훨씬 널리 알려진 규칙이니까.


컴퓨터의 사용 설명서를 쓸 수 있는 건 그걸 만든 인간밖에는 할 수 없다. 지금의 형태가 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고 어떤 의도로 어떤 타협을 거쳐 만들었는지 1부터 100까지 모두 알고 있는 사람은 만든 사람밖에 없으니까.


안타깝게도 사람은 만든이를 만날 수가 없다. 부모님은 아니다. 부모님은 원래 있는 재생산 메커니즘을 그대로 따라갔을 뿐이다. 우리가 만나길 원하는 건 이 매커니즘 자체를 만든 사람이다. 그래서 종교가 있는 거 아닐까. 근데 사실, 창조자를 만날 수 있다 해도 우리의 사용 방법을 물을 수는 없다. 그가 정한 것은 설탕 분해를 기본으로 하는 생명의 메커니즘이지 우리 손가락이나 갈비뼈 숫자 따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 관계는 어렵다.


인간은 관계를 무기로 생존해왔다. 하나 하나의 개체가 그 생존능력이 뛰어나지 않기 때문에 도구를 만들어 생존 가능성을 높여야 했는데, 피부색을 바꾸는 정도의 대응을 하는 다른 종족들과 달리 도구를 전달하는 데는 수 세대를 거친 자연선택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냥 과정을 보여주기만 해도 옆에서 따라할 수 있었고, 가르쳐줄 수도 있었으니까. 머리 좋은 사람만이 살아남는 게 아니라, 머리 좋은 사람이 상대적으로 많은 무리가 통째로 번성하였다. (물론 머리는 여러 방향으로 좋을 수 있다. 한 집단 내에서 쌓인 부를 자신의 것으로 돌리는 데에 특화되어 있을 수도 있고, 안 되던 걸 되게 만드는 데 특화되어 있을 수도 있고,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는 데에 특화되어 있을 수도 있다. 여기서 좋다는 건 2번째 거. 안 되던 걸 되게 만드는 데 집착하는 부류이다. 생존할 수 없는 환경을 생존할 수 있는 환경으로 만드는 것.) 관계라는 것은 성배가 되었다. ‘사회적’인 동물이기에, 제대로 관계맺지 못하는 것이 죄악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리고 실제로 자신의 삶이 좀 불편하다. 인간은 인간과의 관계로부터 안심을 얻도록 설계되어 있다. 자기 무리가 많으면 안심하는 것이 인간의 코어 프레임워크에 새겨져 있다.


사람마다 사람과 잘 지내는 능력을 개발한 정도는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그 정도가 심해서 살인을 저지르고 도둑질을 하려고 하는데 그걸 막지 못한다거나 용인한다면 인간 전체의 생존에 위협이 된다. 어디에선가 차갑게 선을 그을 수밖에 없다. 그게 법이다. 사회적 행동규범의 최소조건을 법으로 만든 것이다.


그러니까 이걸 역으로 해석하면 자기 자신이 어떤 소외감을 느끼는 것과 상관없이 법률을 심각하게 위반하지 않는 이상 누구든 시스템에서 내치지 않는다. 위기에 봉착할 수는 있겠지만. 함튼 포인트는... 우리가 보통 고민하는 인간 관계 문제는 (그러니까 싸웠다거나 뭐 기분이 좀 상했다거나 그런 건) 법적 영역을 건드리지 않는다. 그냥 자기 자신의 기분 문제일 뿐.


그러니까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 건드려서 안 되는 영역을 건드린 것은 그 자체로 일부 어쩔 수 없는 일이고, 그렇게 큰 일도 아니고, 누가 뭐 크게 잘못한 것도 아니고.


괜찮다는 이야기다.


다음부터 안 그래도 되고, 다음부터 안 봐도 되고. 어느 쪽이든 괜찮다. 그럴 수도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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